제천시 - 3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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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십니까?"
도움을 요청하는 쇼트웨이브의 고함이 끝나기가 무섭게 육중한 여닫이 문이 벌컥 열리며, 집사가 상체를 들이밀었다. 순간 그녀는 이 인간이 지금까지 문 밖에서 귀를 대고 있었나 하는 의심이 왈칵 밀려들었으나, 당장 그런 문제를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이 변기 좀 어떻게 해 보세요. 어서요."
쇼트웨이브가 다급하게 외쳤다.
집사는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지금 막 스타트를 끊은 경보선수처럼 빠르게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동시에 쓰고 있던 파나마 모자를 벗어서는 담배 파이프와 함께 그러잡아, 그것들을 차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모자는 거꾸로 뒤집혀져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멈춰섰다. 파이프가 운두 속에서 모서리를 따라 멧돌 갈리듯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뒤로 빗어넘긴 집사의 머리카락은 아교칠을 해놓은 말총처럼 한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하게 그의 두상에 달라붙어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쇼트웨이브는 바지를 벗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이 마아가린를 통째로 처바른 피둥어처럼 징글맞기 짝이 없는 집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게 마음에 걸린 나머지 안절부절 못하며 욕실 입구를 어정쩡하게 가로막고 서 있었다. 하지만 집사는 쇼트웨이브의 염려 따위엔 아랑곳 없이 입구에 서있던 그녀를 살짝 지나쳐 망설이지 않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변기에 끼어있는 디지털퍼머를 발견하자마자 1.4 후퇴 당시 한강 둔치에서 헤어진 여동생을 30년 만에 상봉하는 오빠처럼 얼른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으면서 그녀의 양손을 찾아 쥐었다.

"이런,이런..조금만 참으십시오. 이 변기에 익숙치 않으실 거라는 걸 미리 예상했어야 했는데, 제 실수였습니다."
무단으로 손을 쥐어 잡혔으나, 디지털퍼머는 그 손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 좀, 이것 좀 멈춰 주세요. 이게 살아있어요. 뭐가 자꾸 뒤로..뒤로.."
디지털퍼머는 울상이 된 채 그에게 매달렸다. 집사가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무슨 얘기인지 알고 있습니다. 뒤쪽에서 움직이는건 변기의 위족이예요. 아시죠? 위족. 가짜다리. 살아 있는게 아닙니다. 벌레도 아니구 나쁜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침착하시고 크게 숨을 쉬세요. 그렇죠. 그래요, 좋습니다. 설명해 드릴께요. 이건 단지 변기에 장착된..말하자면 일종의 인지장치가 가동된 겁니다."
쇼트웨이브는 얼른 집사쪽으로 다가가, 점심으로 해바라기씨를 먹다가 사로잡힌 십자매처럼 집사의 손 안에서 파닥거리는 디지털퍼머의 옆에 섰다.
"인지장치라니 대체 무슨 소리세요?"
쇼트웨이브가 집사를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집사는 여전히 디지털퍼머의 손을 잡은 채로 쇼트웨이브를 올려다 보았다.
"이 변기는 단지 사람들의 배설물만을 치우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닙니다. 이건 평소엔 변기 역할을 하는 위생도구입니다만, 필요할 경우 질병의 상태를 파악해 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능동적인 건강검진 기구이기도 하고, 가능하다면 발견된 질병을 고칠 수도 있게끔 설계된 매우 적극적인 치료설비이기도 하지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건강이나 치료라는 것은 제한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말이긴 합니다. 이 변기에 있어서는, 대장과 항문에 관한 건강이나 치료를 뜻하는 것이지요. 변기의 인지장치가 움직였다는 것은 검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구요, 뚜껑이 다물어져 아가씨를 구속한 것은 아가씨께서 검진이나 치료를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집사는 가볍게 디지털퍼머의 손등을 두드리며 안심을 시키려는 제스쳐를 취했다.
"제 생각엔 아마도 큰 아가씨께서 평소에 변비가 있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그렇죠?"
"제발 좀 멈춰달란 말이예요."
디지털퍼머가 울음을 터뜨리며 안타깝게 소리쳤다.
"이게 제 속으로 들어오려고 한다니까요!"
"멈춰달라잖아요. 뚜껑 좀 열어보세요."
보다못한 쇼트웨이브가 발을 구르며 날카롭게 외쳤다.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글쎄..멈출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변기의 인지장치는 스스로 작동하고 스스로 멈춥니다. 인지장치가 움직였다는건 이 변기가 큰 아가씨를 치료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디지털퍼머가 얼굴을 찡그리며 낮지만 당겨진 피아노 줄처럼 팽팽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팔 다리가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
"벗어나려고 할 수록 변기는 더욱 세게 큰 아가씨를 압박할 거예요. 애초에 변기가 이렇게 큰 아가씨를 붙잡은 것도 아마 큰 아가씨가 적절한 배변행위를 하지않고 자리를 뜨려고 했기 때문일거 같습니다. 변기가 판단하건대, 치료대상이 장내에 숙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을 보지 않고 변기를 벗어나려고 할 경우에 치료대상을 이렇게 강력하게 붙잡곤 하지요. 그러니까 이건 강화된 의료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가리켜서 변기가 치료권을 발동했다고 말해요. 아가씨를 붙잡고 있는 것으로 봐선 큰 아가씨의 장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듯 합니다."

쇼트웨이브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디지털퍼머는 몸을 꼬며 숨 넘어갈 듯한 신음소릴 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하세요. 변기가 치료권을 발동하다니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 시에서는 시민들이 모두 건강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인구에서 환자들의 비율이 많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게다가 치료가 늦어 인구 손실이 나거나 전염병이라도 돌면 더 큰 문제니까요. 따라서 치료권과 완치의무라는 것이 생긴 겁니다. 이 변기처럼 치료기능을 가진 모든 기구가 치료권이란걸 가지고 있어요. 이것이 발동되면 치료대상은 반드시 요구되는 치료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완치 의무라고 하는 거지요. 질환이란 것은 시정되어야 할 잘못이니까 말입니다."
디지털퍼머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는데 이번 것은 밤길에 칼 든 강도를 만났을 때 지르는 소리 만큼이나 급박한 것이었다.
"어떡해..어떡해. 나 몰라. 엄마."
그녀는 몸을 둥글게 말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니. 응? 괜찮아?"
쇼트웨이브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디지털퍼머는 얼굴을 무릎 속에 묻은 채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만 좀 하세요. 이러다 애 죽겠어요."
쇼트웨이브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집사에게 소리쳤다. 집사가 디지털퍼머의 손을 모아잡으며 그녀를 찬찬히 응시하더니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치료 중인거 같습니다."
"무슨 치료? 변비 치료요?"
쇼트웨이브가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집사에게 대들었다.
"작작 좀 하시죠. 단지 변비에 대해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어요."
집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질환에 대해서도 경중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법 앞에 모든 질병은 동등하지요. 심장마비나 변비나, 손가락에 난 티눈이나 모두 다 중요한 질환들이고, 공히 동등한 치료권이 발동됩니다."
"치료권이 어쨌거나 저희는 그런거 모르겠구요, 어떤 기계든 위급한 경우에 작동을 멈추게 하는 장치가 있잖아요. 이 변기를 멈춰 달라구요. 세워주세요!"
집사의 검은 눈이 쇼트웨이브의 입술 끝과 귓볼 근처를 오갔다.
"제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신거 같습니다. 이게 위급상황인 거예요. 치료가 시작된 것 이상으로 우선 순위는 없습니다. 변기는 큰 아가씨의 상태를 위급한 경우라고 전제한 후에 치료권을 발동한 것이지요. 이건 모든 규칙에 앞선 규칙입니다. 아무도 치료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집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귀 가까이 입을 대고 말했다.
"침착하세요, 큰 아가씨. 지금 처음이라 무척 당황하셨겠지만 이거 사실 별거 아닙니다. 우리들도 가끔씩 이렇게 치료 받을 때가 있는데요, 일단 치료가 끝나고 나면 속이 굉장히 편해져요. 정말입니다. 특히나 이 변기는 실수없이 치료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제품이예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디지털퍼머는 집사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으나 그는 더욱 다정하게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고 변기의 진료를 믿으세요. 긴장을 푸세요."
눈을 감고 집사의 말만 듣는다면 웃음이 터질 법한 상황이었으나, 쇼트웨이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디지털퍼머가 손을 뻗어 쇼트웨이브의 다리를 잡으며, 식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집사님 좀..내보내.."
쇼트웨이브가 윗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님! 나가세요."
집사가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
"아니, 제가 옆에서.."
"빨리 나가세요! 어차피 도움도 안되잖아요. 변기를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서요."
쇼트웨이브는 거의 반쯤은 디지털퍼머를 껴안고 있는 집사를 일으켜서 욕실 밖으로 내쫓았다.
"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무슨 일이라도.."
집사가 욕실 문 입구에 서서 뭐라고 얘기를 더하려고 했으나, 쇼트웨이브는 그의 코 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괜찮아? 어때?"
디지털퍼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고통을 참느라 애쓰는 그녀의 관자놀이엔 땀이 샘처럼 솟아났고, 핏기가 가셔진 입술 사이로 숨막히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배 속까지, 배 속까지..들어왔어. 그게..아랫배를 훑고 다녀."
그녀는 헉헉거리며 친구의 팔을 움켜잡았다.
"죽을 거 같아. 어떻게, 어떻게 할 수가 없어..커졌다 작아졌다 해. 배 속이 소용돌이 치는거 같아."
갑자기 그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보다못해 눈물까지 글썽이며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디지털퍼머는 아무 얘기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그녀는 다락에서 발을 잘못 딛어 굴러 떨어지는 사람처럼 헛숨을 들이켰다.
"안돼.."
그녀는 칭얼거리는 것처럼 나지막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딜러가 탄력을 이용하여 트럼프를 뒤섞을 때 카드 낱장이 차례로 쌓여나가는 소리와 비슷한 음향이 변기 안에서 들리더니 디지털퍼머는 곧바로 설사를 시작했다. 그것은 대장의 경련을 이용해서 강제적으로 발생시킨 격렬한 배변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득 고인 눈으로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한꺼번에, 한꺼번에 배 속에 들어와 있던 게 빠져나갔어. 그래서.."
그녀는 납작하게 눌린 채 매우 불편하게 숨을 쉬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쇼트웨이브는 아마도 집사가 위족이라고 했던 것이 디지털퍼머의 항문을 통해 장 안으로 들어가 그 안을 휘젓다가 강제적으로 대장의 경련을 일으키고는 한꺼번에 빠져나갔다는 얘기라고 이해했다.

배변이 잦아들고, 거친 숨을 쉬던 그녀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것 같아 쇼트웨이브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이 난리통이 다 끝난게 아닐까 싶어 그녀는 힘을 주어 변기 뚜껑을 밀어올렸으나 여전히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덤덤탄에 맞은 아일랜드 무장 독립군처럼 신음을 내며 또다시 디지털퍼머가 격하게 몸을 비틀었다.
"또 왔어, 또..또 들어오려고 해. 어떡해."
쇼트웨이브가 강제로 뚜껑을 열기 위해 지렛대로 쓸만한 것이 있는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욕실 내부는 흠집 하나 없는 철제 캐비닛처럼 견고한 대리석만이 얼려놓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부드러운 연두부 빛을 창백하게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절망적인 외마디 소리를 냈다.
"괜찮아? 괜찮아?"
당황한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의 머리를 껴안았다. 1000미터 달리기의 결승점에 다다른 주자처럼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던 디지털퍼머가 장대처럼 높은 음의 긴 탄식을 터뜨렸다.
"정말..정말..어떡해.."
울음과 함께 격렬한 또 한번의 설사가 이어졌다.

이상한 것은 디지털퍼머가 그토록 많은 양을 배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변기가 배설물 뿐 아니라 냄새까지도 흡입해 버리는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 듯 싶었다. 쇼트웨이브는 토끼처럼 떨고 있는 디지털퍼머를 감싸 안았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으로 보아 위족이 그녀의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혼란에 빠져 버린 그녀는 숨만 헐떡일 뿐 아까처럼 심한 거부의 몸짓을 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교감신경은 극도의 흥분상태를 반복시키는 이물질의 침입에 시달리다 못해, 인내할 수 있는 피로도를 넘어서 실타래처럼 엉켜 버리는 중이었다.
변기의 위족은 디지털퍼머의 대장을 깊숙히 역류해 복부 근처 가로로 길게 늘어진 횡행결장의 한 지점을 꾸준히 자극하고 또 자극했다. 그곳은 대장의 연동운동이 시작되는 부위였다. 그것이 그녀의 배설리듬을 불쾌한 방식으로 촉발시켰고, 뇌신경핵으로부터 시작되는 미주신경은 처음 보는 이 배설물을 몸 밖으로 빨리 내보내라는 신호를 각 기관으로 강력하게 쏘아보냈다. 장이 경련을 일으키면 깊숙히 들어찼던 위족이 썰물 빠지듯 단번에 장을 훑으며 빠져나갔고 그 서슬에 디지털퍼머는 남아있던 모든 찌거기를 몸부림치며 배설하는 것이었다.

덜컥 하며 디지털퍼머를 물고 있던 변기 뚜껑이 그녀를 놓더니 모터로 작동되는 자동문처럼 부드럽게 올라갔다. 디지털퍼머가 힘없이 쇼트웨이브의 품 속으로 쓰러졌다.
쇼트웨이브는 무의식 중에 그녀를 닦을 수건을 찾았으나, 그녀의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드러난 그녀의 엉덩이는 새하얗게 닦여 물기 하나 없이 말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액상세제를 사용해 수세미로 깨끗이 설겆이한 그릇처럼 디지털퍼머는 안팎으로 광이 날만큼 닦여있는 상태였다. 쇼트웨이브는 얼른 그녀의 팬티와 바지를 올려 하체를 가렸다. 디지털퍼머가 소리를 죽여 울었다.
"괜찮아? 다친데 없어?"
한참을 울던 그녀가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눈과 코가 새빨개져 있었다.
"죽고 싶어. 대체 이게 뭐야.."
쇼트웨이브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설 수 있겠어? 나가서 좀 눕자. 누워서 쉬면 좀 나아질거야."
쇼트웨이브가 부축하자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팔에 기대 욕실 밖으로 나오자 테이블 옆 팔걸이 의자에 앉아있던 집사가 일어났다.
"괜찮으십니까?"
쇼트웨이브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리 꺼져요."
난처한 표정으로 집사가 팔을 벌리며 변명을 늘어놓듯 말했다.
"놀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의도되지 않았던 문제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군요. 매우 생소하고 또 기분도 나쁘셨겠지만 우리는 일상화 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이건 문화의 차이입니다."
"문화의 차이요?"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침대에 눕혀놓고 일어나 집사를 마주보았다. 두 눈엔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해 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예요. 저희가 살던 지구상에는 수많은 문화가 있었지만, 그 중의 어떤 문화도 처음 찾아 온 손님의 엉덩이를 쑤셔대진 않아요. 아시겠어요.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이나 완전히 이해 못할 이질적인 환경에서 살아왔던 종족이라도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기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라구요. 상대의 몸에 손대지 않는다는 게 그런 종류의 예의들이죠. 그걸 누가 가르쳐 줘야 아는 건가요."
그녀는 침대에 늘어져 있는 친구를 가리켰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구요!"
"화내시는 이유를 물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기본적이고도 공통적인 예의라는 건 어쩌면 최고로 가치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집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최고의 허구이기도 하지요. 마치 언어처럼 말이예요. 고유명사를 생각해 보세요. 커튼이나 꽃병처럼 사물을 지칭하는 언어 말입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그 언어를 파헤치고 또 파헤친다고 해도 사물이 나오지는 않지 않습니까. 언어의 중심엔 사물이 있는게 아니라 그냥 텅빈 허공 뿐이지요. 공통적인 예의라는 것도 있을 법하긴 합니다만, 그건 옆면으로 서 있는 동전과도 같아서 균형을 유지한 채로 끝까지 버티기 보다는 앞이나 뒤를 보이면서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집사가 공손한 몸짓으로 몇 걸음 옆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의자 옆에 가려져 있던 음식 운반용 카트가 눈에 들어왔다. 집사가 그것을 끌어내며 말을 이었다.
"앞면이나 뒷면 중 어느 특정한 한 면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한테 다른 면이 뒤집힌다는 것은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겠지요. 이게 도박이 아닌 이상에야 내심 다른 면을 기대하고있던 사람들한테는 사실 이것도 상당히 무례한 일 아니겠습니까."
"잘도 갖다 붙이시는군요. 지금 저는 예의에 관한 언어학적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는게 아니고, 예의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집사님이, 그리고 저희를 손님이랍시고 초대한 이 제천시가 말이예요. 그리고 이런 무례함이야말로 이 곳의 정체성을 말해주죠. 집사님께서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이 곳을 미화시키더라도 그건 가려지지 않는 거예요. 정체성이라는 건 주장되는게 아니라 발견되는 거거든요. 집사님께서 아까 벌판에서 저희의 도움을 바란다고 하셨나요. 정말로 저희의 협조를 바란다면 좀 더 예의바른 방법을 찾아보시는게 좋겠네요."
집사가 상냥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가씨들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제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큰 아가씨를 그렇게 만든 것은, 몸을 상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치료를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집사는 카트를 밀어 침대 옆에 놓았다. 방금 구워낸 듯한 먹음직스런 빵과 디저트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시는건 무리일 것 같아 취소를 시켰습니다. 대신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지고 왔는데 놓고 갈 테니까 두 분이서 천천히 드세요. 이건 초코 크런치와 사워크림을 사용한 크림치즈 타르트구요, 이쪽 접시에 담긴 것은 특별히 호박을 넣어 만든 키슈로렌입니다. 생크림과 베이컨을 넣어서 구운 거라 힘이 나실 거예요. 이쪽 것은 다른 것들을 다 드시고 난 다음에 디저트로 드시는 겁니다. 백포도주와 오렌지 무스를 넣어서 만든 오렌지 상귄느예요. 여자 분들이 좋아하시는 음식이지요. 음료수는 밑 칸에 넣어 놓았습니다."
설명을 마친 집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오늘 밤은 푹 쉬세요. 내일 아침 8시 쯤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 전에라도 필요한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딴에는 그녀들의 마음이 놓이도록 지어보이는 미소였겠지만, 집사의 웃음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볶은 땅콩을 압착시켜 뽑아낸 땅콩유처럼 기름기 줄줄 흐르는 것이었다. 그녀들이 아무 말 하지 않자 집사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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